공지사항

대전대 개교 30주년 기념 백두산 관광을 하고나서-

유준원 2010. 7. 24. 22:34

                              연길 국제 공항 정면사진으로 여행객은 거의 한국인과 조선족이다.

                               비행기 시간 전광판을 보면 청주와 인천이 교대로 표시되어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 조선족 박물관 전경.

 

                              가운데 상감청자 주전자는 손잡이가 없지만 수억을 넘을 것 같다.

                             백두산 즉 장백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하여 인공물 철거의 일환으로

                              천지호텔이 영업 정지 중에 있다.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침엽수림 지역을 지나 고산지대의 특징인 초원이 펼쳐진다.

 

 

                            초봄을 지나서 야생화가 군데 군데 피어 있었다.

                            천지 분화구로 내려가면서 촬영을 한 것이다.-이하 계속-흰색은 잔설.

 

 

 

 

 

 

 

 

                           천지에서 장백폭포 쪽으로 내려 가는 계곡으로 가까이서 보면 웅장하다.

 

 

 

 

 

 

 

 

 

 

 

                            장백폭포로 내려가는 계곡-장백온천이 멀리보인다.

 

 

 

 

 

 

 

 

 

 

 

 

 

 

 

                             정상으로 올라 가는 길-정상엔 풀도 없고 굵은 모래와 화산석들이 있다.

 

                            이곳까지 이스타나로 이동해서 여기서 천지로 가고 또 정상으로 간다.

                               정상의 윤곽이 보인다. 무슨 무협지의 한장면 같이 음산하고

                                정산 넘어서는 천길 만길 낭뜨러지가 안개 구름속에 보일듯 말듯 한다.

 

 

 

 

 

 

 

 

 

연길에서 백두산 관광과 두만강 조중접경을 보고나서

 

대전대학교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일행은 대전대학교 교수와 교직원, 대전 대흥동 한방병원 혜화병원,대전 둔산동 한방병원, 천안 한방병원, 청주 한방병원, 교수와 교직원 등

약 80여명이 한 팀을 이뤄서 장맛비 오는 청주 공항에서 기대에 찼으나 약간의 두려움으로 각자 담소와 서성이다가 출국수속 후에 중국 남방항공사의 중형 여객기에 탑승을 했다.

 

약 1시간 45분 동안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하늘의 구름층이 불규칙하여 간간히 기류이상으로  기체가 흔들리는 현상이 발생을 해서 일부의 승객들이 약간의 동요도 했었으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수도에 해당하는 연길시 공항에 무사히 도착을 했다.

 

점심은 기내식으로 해결했으므로 우린 바로 연변박물관을 잠시 방문을 했다. 이동용 버스는 리무진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자 쿠션 등이 좋은 고급관광버스로 나중에 들은 예기지만 연길시에 이런 고급버스가 3대 있는데 두 대를 우리가 사용을 한다고 했다.

 

박물관은 크지는 않았으나 중국 내에서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박물관을 둘러보니 우리민족만의 문화의 우수성을 다시 확인을 할 수가 있어서 자긍심을 느꼈다.

 

저녁 식사 후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 가이드가 중국 현지 시간으로 4시 반에 기상을 시킨단다.

백두산 트랙 킹을 대비하여~미티-(참고로 중국과 한국과의 시차는 한 시간이 한국이 빠르다.)

 

익일 기상 후에 한국 집에서 출국 전에 목욕재계를 했으나 그래도 다시 한 번 샤워를 한 후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차에 올라 백두산 북파 코스로 등정을 위한 출발이 이뤄져 약 4시간 동안을 차로 이동을 했다. 날씨는 구름 낀 비오는 흐린 날이 었다.

매우 설레는 마음-민족의 영산에 올라간다는 기대감에 기분은 한층 상승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힘이 들 때면 대한민국 육군가를 읊조리는데 잠시 그 가사를 적어보면

 

백두산 정기 뻗은 삼천리강산

무궁화 대한은 아세아의 빛

-중략 -

그 이름 용감하다 대한 육군

앞으로 앞으로 용진 또 용진

우리는 삼천만 민족의 방패

앞으로 앞으로 용진 또 용진

우리는 삼천만 민족의 방패---

 

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힘이 절로 솟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백두산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사실 잠도 오지 않았다.

중간에 휴게실 겸 상점에서 볼일도 보면서. 화장실이 아직도 옛날 우리나라 시골 통시(경상도 사투리로 화장실)수준이나 약간의 개선의 느낌은 받았다.

 

7시에 출발하여 10시에 해발 약800미터인 이도백화 하늘아래 첫 동네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국의 좀 큰 면소재지 수준의 도시로 착한 가이드는 과거 백두산 산적들의 후예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하여

좀 겁을 주었다.

10시에 식사 후 11시에 출발하여 오후 12시에 백두산 중국이름 장백산 정문 밑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안에서 가져온 긴팔 티와 바람막이 잠바를 입고 우의를 입고 비가 쏟아지는 차장에 내려서

 

걸어서 위로 올라가 셔틀버스 주차장 즉 백두산 정문으로 가서 기념촬영도 하고 입장표도 사서 입장 후에 셔틀버스주차장에서 탑승을 하여 약30분 동안 위로 달려서 지프차 주차장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지프차로 바꿔 타고 약 25분간 위로 달려올라 갔다.

 

가다가 보면 침엽수림과 또 다른 수목 군이 나타난다. 하필 비가 쏟아 져 서글펐으나 한편 시원도 했다.

 

칠월중순인데도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아 있었다. 비가 오고 안개가 간간이 지나가는 날씨 상태인데 지프차로 잠시 달리다 보니 나무가 없고 초원만이 펼쳐지는 소위 대평원 같은 산자락이 나타나서

 

길옆에는 야생화가 피어나고 해서 이국적인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생각해 보니 그곳은 이제 초봄을 지나서 작은 꽃들이나마 피어나지 않았나하고 생각이 든다. 일 년에 3개월여 눈이 녹아있고

나머지는 수 미터나 그이상의 눈들로 온 산이 덮여 있는 다고 하니

이곳 백두산에 이제 진정 아름다운 봄날이 다가 온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지프차 주차장에 1시 40분경에 도착하여 보니 온통 운무로 어떨 때는 시계가 1미터도 안되었다.

우린 사전 준비로 등산화 비닐 우비 그리고 긴팔의 티와 바람막이 점퍼 등으로 무장을 해서 그나마 덜 추웠다. 비바람과 운무 그리고 추위와 강풍으로 일행과 떨어지게 되면 정말로 힘들어 지므로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라 생각이 든다.

 

트랙킹 코스가 아닌 조는 잠시 후에 내려가 장백폭포로 가서 온천욕을 하고 트래킹 코스인 우린 조를 짜서 천지를 향해 미끄럽고 춥고 간간히 비바람 강풍으로 힘들게 앞으로 전진을 했다.

 

철벽봉과 화구 내벽과 천지 물가로 내려가는데 경사가 급해서 아주 힘들었다. 그래도 간간이 디카를 꺼내어 사진을 촬영을 하면서 내려갔다. 비바람이 올라 치며 좌우로 부는 것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코트형 비닐 우비를 입은 나는 벌써 바지의 거의가 젖은 상태로 바지가 살에 감기며 이동을 했다.

 

간간이 천지의 1/3 이나 2/3의 전경이 보여 다들 감탄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으나 나중에 보니 운무로 인해 잘 안보였다.

그래서 생긴 말이 천지의 전경을 깨끗이 보려면 평소에 덕을 많이 쌓아야지 볼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약 10일에 1-2일정도가 맑은 날씨가 되어 천지의 전경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맑은 날도 운무가 날아다님으로 인해 시시각각 변화무쌍의 날씨 변화가 있다고 한다.

내려가는 길이 온통 작은 자갈밭과 주위에 온통 바위뿐이어서 신발은 바닥이 크게 거친 신발과 장갑 정도는 필히 준비를 해야 만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고생을 덜 할 것이다.

 

분화구에 힘들게 내려와 천지물이 있는 곳으로 갈려니 작은 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도랑물은 꽤나 깊고 너비는 약 5미터 건너기에 힘이 들었다.

누가 안 잡아 주었으면 물에 거의가 빠질 것이다. 주위 풍광은 아주 멋지다. 신발 안에 물이 질퍽거리고 젖은 옷은 달라붙어 괴롭히나 천지호수를 보기위하여 주위 풍광을 촬영해 가면서 천지로 갔다.

 

파도가 철썩이며 물결이 밀려온다. 다들 천지 물을 기념으로 가져간다고 야단들이다. 나도 물 병 두 개에 받아서 천지 정상 밑 지프차 주차장에 와서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 생각해 보니 하늘의 물이

천지물이고 천지물이 하늘의 빗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그 물 두개를 휴지통에 버렸다.

 

찌꺼기가 안 들어가게 10여 분간 노력하며 받아서 힘들게 위로 가지고 온 물인데 - 생각의 나름으로 인해 가벼운 마음으로 버렸다.

다들 가져간 영양갱 초콜릿 기타 컵라면 등등을 먹고 하는데 나는 빈 몸으로 가서 먹을 것이 없었으나 점심을 많이 먹어 시장하지는 않았다.

어느 분이 경험이 있어서 그곳에 갈려면 다 두고 가야지 내 몸도 귀찮아 진다고 하기에 그 말에 따랐다.

 

천지분화구에서 지프주차장 까지 올라가는데 그분 말에 백프로 동감을 했다.

일행과 좀 뒤에 처져 있어서 잠시 빨리 올라가는데 아~ 이건 숨이 목에 탁 막히고 심장이 약간 조여 오고 답답해 오고 영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잠시 착한 가이드분의 말이 떠올랐다.

분화구에서 올라 올 때는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누가 잡으러 오지도 않고 또 바쁘지도 않으므로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 천천히 쉬면서 올라오라고 하던 말이 귓전을 때려 쉬며 기분을 밝게 하면서 가슴을 펴면서

 

그리고 요가의 완전호흡법과 양 손목의 신문도 지압을 해가면서 이동을 하니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앞서 간 일행을 따라 갔는데 여직원이 힘들어 해서 앞에서 이끌고 가는데 그래도 처음 보다가는 힘이 덜 들었다. 마음의 안정도 찾고 또 완전 호흡법을 시행을 하여서-

 

분화구 위로 올라와 사진을 촬영하다보니 일행을 또 먼저 갔다. 일단 분화구를 올라왔으니 나는 여유를 가지고 좀 위험하나 좀 더 길 위로 올라가서 천지를 위에서 내려 다 보는 여유도 즐겼다.

 

또 가다가 보니 어떤 여인네가 힘들어 하면서 길옆에 앉아 있기에 잠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들어보니 조선족 말씨라 말을 걸어보니 하필이면 다른 팀 산악 가이드 이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골프장

알바를 하다가 처음으로 산악가이드를 하는데 너무 힘들다고 하며 헐떡거린다. 힘들었지만 다시 지프주차장에 와서 소변을 보고 정상의 정복을 위하여 길을 재촉했다. 지프차는 한국의 쌍용 이스타나 였다.

 

황토색의 정상 봉까지는 약 10여분이 걸렸다. 바람이 안개와 함께 더욱 거세었다. 그래서 천천히 이동을 해서 좀 더 걸렸는지도 모른다. 혼자 올라가는데 전부 중국인이었다.

 

정상에 갔다가 그 위용에 감탄을 하고 잠시 소원을 빌어보고 돌아서 내려오는데 길을 몰라 우측으로 가면 혹시 다른 길로 갈까 해서

다시 돌아서 가서 물어 보려 했으나 중국인이라 망설이는데 한국 40대3명이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말을 해서 물어 보니 그리로 가더라도 지프 주차장으로 간다고 해서 내려가 휴게실에서

잠시 구경을 하고 나가니 가이드가 반겨서 바로 차를 타고 내려 왔다.

 

원래 분화구에서 장백폭포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내려가는 석문이 파손되어 어쩔 수 없이 힘든 코스로 산행을 했는데 여행사 말로는 그 대상인 우리가 대전에서 첫 시험 고객이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코스는 유지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워낙 험난한 길이라서 말이다.

 

장백폭포에 도착을 하여 보니 폭포의 웅장한 낙차가 일품이었다. 일행 중에 한분이 말씀하기를 이곳까지 북한령이 었으나 625사변 당시 김일성이 전쟁에 패색이 짙어지자 모택동에게 이곳을 포기하고

중공에 넘기고 팔로군을 참전시켜 현재의 휴전선을 유지했다고 한다.

또 현재도 중국에 일부 지역을 조차시켜서 땅을 파는 중이라고 하였다.

 

이 대목에서 잠시 국가 지도자에 대하여 생각을 다듬어 보았다.

1970년대만 해도 북한이 중국 보다가 훨씬 잘 살았는데 지금은 한쪽은 인민들 수백만 명이 굶어 죽고

심지어 자식도 팔아 먹고 인육도 먹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

 

다른 한쪽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경제 민주주의를 이룩하여 소위 흑묘 백묘론의 신봉으로 더 나은 경재발전을

이루어 과거보다 더욱 풍요로운 국가 건설에 이바지를 하고 있다.

 

일국의 지도가의 역할이 중요함은 당연하나 공산주의 중에서 유독 북한만이 3대 세습으로 국가의 발전을 로 막고 있으니 무척이나 안타깝고 불쌍하고 가엽다.

다른 공산주의 나라들은 그래도 정권이 바뀌고 해서 전임 지도자의 공과를 논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비록 사상의 특성상 민주주의 보다 발전은 엄청 드뎠을 지언정 -오늘 7월 22일 저녁 뉴스에 김정일이 진지구에 이어 청진지구도 중국에 장기임대를 했다고 나오는데 야금야금 현재도 북한 국토를

매각 하는 중 이란 생각이 나 역시 들어 무척 안타깝다.

 

우리는 장백온천욕을 사양하고 휴게실로 가서 맥주 캔 하나씩 마시고 나니 출출한 상태에서 조금의 여독도 풀리고 해서 아주 기분이 상쾌해 좋았다. 그 맛은 아마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온천욕비가

한국돈 15,000원으로 좀 고가이나 들리는 말에는 안의 시설은 별로라고 했다.

 

폭포로 올라가는 길에 노천온천수로 삶은 계란도 사서 먹고 또 길옆의 작은 노천온천수에다가 석 온천욕도 잠시 하면서 비록 손목까지 만이지만 말이다.

군데 군데 김이 나면서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니 무척 신비로웠다.

 

조선족 착한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노천온천수 수온이 100도가 되면 백두산이 폭발을 한다고 며 현재의 수온은 86도로 어제는 85도 였단다. 그러면서 무서워 죽겠다고 귀엽게 말했었다.

물론 궤변인줄 알지만 약간의 신빙성은 있는 것 같아서 겁도 안났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백두산 화산이 활동을 최근 수 십여년 동안 급격히 증가 했는데

이것은 화산의 폭발 시기가 다가 온 것도 이유가 되지만 북한의 수차례에 걸친 원자폭탄 지하 핵실험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로 애통한 일이다.

 

장백온천에서 5시 반 지나서 출발하여 이도 백화로 오는데 가이드가 백두산 산적 예기를 하면서 밤에 호텔로 전화가 오는데 12시 지나서 오는 것은 받지 말란다. 안마 유도의 전화이나 기타인데 혹시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을 하란다.

특히 사회 지도층 분들은 불순분자의 노예가 될 수가 있으니 조심을 하라는 그런 말도 한다.

 

그러면서 내릴 때에 여권을 모두 거둬서 가져갔다. 속으로 저 많은 여권 한 개만 분실하면 가이드 자기들 말로 3개월간 여권 발급 때 까지 남자는 가정부하고 여자는 귀부인 노릇을 해야 한다고 했고 또 한국인 여권 한 장 가격이 한국 돈으로 500만원이라고 했으니

자기들의 손해도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도 들어 약간 안심도 되나 또 한편 불안했다.

 

이도백화에서 한군데? 밖에 없다는 온수가 나오는 호텔에서 몹시 피곤한 몸을 샤워로 잠시 풀고 젖은 옷도 갈아입고 어느 분의 안내로 여분의 비닐을 몇 장 더 가져 왔는데 아주 요긴히 잘 사용을 했다.

여유가 있으면 신발도 한 켤레 더 가져오면 참 좋을 것이다. 물론 슬리퍼도 같이 말이다.

 

호텔식당에서 역시 다들 입맛에 맞는 식사를 맛나게 하고 방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이곳 이도백화에서 하나 밖에 없다는 호텔 옆 노래방-창고 같은 곳으로 가이드가 안내해서 그곳에 들어가니 안의 시설은 그나마 괜찮았다.

한국의 노래방 책과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부를 만 한 노래도 많이 있었다.

 

다음날 새벽 두시 반에 해가 떴는데 백야 현상이란다. 미리 커텐을 치고 자서 다행히 일어 나지는 않았다.

식사는 향이 거의 없는 관계로 잘 먹고 7시 50분에 버스에 올라 용정으로 가다가 일송정을 멀리서 손짓하며 지나치고 푸른 솔은 보이는 듯 마는 듯 일제가 노래에 나오는 소나무는

총으로 쏴서 없애 버리고 후대에 우리 조선족들이 다시 심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했다.

 

독립운동 시 일송정 소나무에게 의지하고 대사를 의논하면 이뤄지고 해서 그곳으로 모이고 했는데 일본 군인들이 없애 버렸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농업 도시인 용정에 도착을 하여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대성 중학교를 관광을 하고 서시 비석 앞에서 기념 촬영도 하고 했다.

이곳 연변조선족차치구 농업인들은 한낮에는 거의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예기로는 이곳 사람들은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 밭일이나 논일을 한 후에 낮에는 쉰다고 했다. 겨울엔 비록 영하 30도까지 기온이 내려가지만 여름엔 또 영상 30도 이상 올라가니 내 생각에도 매우 현명한 농사법이라고 느껴졌다. 일사병 예방 등에 -

 

대성중학교를 나와서 점심을 먹는데 아주 맛있었다. 우리가 먹은 식당은 소위 그곳의 시장 군수 등 지도층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기분을 업 되게 해 주었다.

 

식사 후에 곰 사육장에 들러 구경을 하고 또 웅담에 대하여 선전을 듣고 웅담주도 한두잔 주는데 나를 포함하여 몇 명은 안 먹었다. 혹시 비위생 처리로 배탈 날까 봐 이다.

 

그기서 나와서 두만강 옆의 도문시를 향해 달렸다.

비로소 그 유명하고 무서운 곳 탈북자가 다닌다는 그곳을 향해 달린다.

여권은 아직도 우리에게 없다. 왜 안주느냐고 질문을 하니 얼마 전에 진보 목사 한명이 도문시 조중접경 지역에서 무단 입북을 하여 혹시나 또 그런 일이 발생을 할까 해서 라며 가고 싶은 사람은 가라고 한다. 웃으면서 -

사실 수 개월 전에 한국의 사업가가 파산을 하고 북한 대사관에 가서 귀화 신청을 하니 그곳 직원의 말이 잘사는 한국에서 왜 못사는 나라로 올려고 하냐며 귀화 신청을 받아 주지도 않고 내 쫓았다는 기사가 신문의 한 면을 장식을 했었다.

 

착한 대전 빙그레 여행사의 배려로 우린 두만강을 끼고 도문시로 올라 갔다.

고속도로로 가는 것 보다가 약 40여분 더 걸리나 좀 더 북한을 볼 수 있게 배려를 한 것이다.

북한의 산은 나무가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개간을 위함과 또 경계의 수월함을 위함일 것이다.

보이는 북한 땅엔 사람이 간혹 다니며 착한 가이드 말로는 자기들 조선족들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 전에는 거의 자유 왕래를 하며 사이좋게 지냈고 70년대 초 만해도 북한이 중국보다도

한국보다도 잘살았다고 아는데 지금은 아주 역전이 되어 안타깝단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그 당시 북한의 아파트를 구경가며 부러워 했는데 지금은 그 당시 아파트는

낡아서 빈민촌처럼 되어있고 도문시는 아주 번창되어 고층건물이 많이 있다고 하며 할 말을 잃었다.

또 과거에는 북한으로 밥한끼 얻어 먹으려고 중국 국경을 넘어 친척집을 방문을 했으나

지금은 북한인들이 중국으로 탈북을 하거나 아니면 배가 고파서 밥 얻어 먹으려고 넘어 온다고 한다.

 

요즘도 가끔 북한을 단체 관광을 할 때에 고아원을 방문하여 애들에게 과자를 주면 애들은 일

없읍네다. 라며 우린 배가 불러 안 먹습니다 라며 거절을 한다고 하고 또 관광차가 서 있을 때에

차창문을 통하여 사탕을 던져 주면 애들은 보는 데서는 절대로 먹지를 않고 그것을 발로 밟고 또

흙속에다가 묻어 버리나 버스가 출발을 하여 멀어지면 환장을 하면서 땅속의 사탕을 꺼내어

대강 흙을 털고 입안으로 꾸셔 넣는 것을 목격 했다고 하니 그 말을 듣는 나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도대체 북한의 가난은 언제 끝이 날려나 끝이 안보임으로 인해 무척 답답해 졌다.

 

우리일행은 도문시에 도착을 하여 보니 무척 더웠다. 관광지의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고

또 시가지가 빌딩이 좀 많은 것이 좀 부유해 보였다. 대나무 땟목을 타고 비교적 수심이 깊고

강폭이 넓은 그곳 두만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4-5명이 타고 작은 의자에 앉아서

사공은 뒤에서 밀고 잠시 올라 가다가 배를 북한의 강변으로 붙혀서 20여 미터 올라가서

다시 내려 오는 그런 코스였다.

 

들리는 말에 전에는 땟목이 북한 강변을 스치고 올라 갈때에 북한 군인들이나 애들이 관광객들에게

물과 음식과 담배와 과자 등등을 요구해서 얻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요즘은 단속이 심해서

그것을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북한 강변 풀 섶을 스치며 올라 갈 때에 갈대 한포기 순을 뽑으면서

일순 김삿갓 김병현을 뜨올려 심사가 울적 하여 졌다. 우리 민족 한민족 단일민족인데 단일 민족--

두만강 가운데가 조중국경인데 뱃놀이를 하는 경우엔 조중이 협상을 해서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해서 관광객들이 사실은 북한 땅을 갔다 온 그런 경우가 되어 아주 심적으로 흥분 되었었다.

뱃삯은 일인당 한국 돈으로 7천원 정도 했다.

 

뱃놀이 후에 옆의 주막에서 막걸리를 파는데 3-4잔을 마셔도 취기가 없었다. 얼음이 둥둥 떠 시원한

냉 식혜를 조금 면한 정도 였으나 불만은 없었다. 워낙 더운 날씨라서-영상 32도---

올 때는 고속도로로 달려 상당히 빨리 연길시에 도착을 하여 저녁 식사를 북한 식당에서 하기 전에

국영 차를 파는 곳으로 이동을 하여 잠시 보이차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또 보이차를 작은 잔으로

무려 15잔을 마셨다. 자꾸 주고 또 남은 것 심심해서 마시고 보이차가 오래 묵을수록 좋다고

여러 가지에 좋은데 변비 기타 등등 그러나 갈등을 하다가 결국 안사고 말았다.

 

그기서 나와서 북한 식당에 가는데 혼자 안갈 수도 없고 해서 들어 갔는데 들쭉술 독하고 맛은 있었다.

써빙하는 종업원들이 아주 프로 답게 잘 했다. 5명 정도 있었으나 한두 명 빼고는 표정이 굳어서

그것이 옥에 티 였다. 다들 한복은 입었는데 어쩌다가 손톱을 언뜻 봤는데 매니큐어도 없이 거칠고

손톱 밑에 까만 이물질도 보여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얼굴은 예쁘게 화장도 했는데---

노래를 세명이 불렀는데 주로 한명이 많이 불러 그 여자가 아마 가수가 아닐까 여겨지고-

북한 노래와 소위 통일노래 정치적인 노래가 나올때엔 일행의 환호가 시원치 않았으나

한국 옛노래와 지금보다 20여년 지난 노래한곡이 나올 때는 흥겨운 사람들이 꽃다발을

한국 돈 만원에 사서 가수에게 안겨 주었다. 언제 부터인가 현금 팁은 안 받는다고 ---

한국 옛 노래를 부를 때는 따라 부르며 박수 치고 환호를 하니 그 가수도 눈시울이 붉어 졌다고

무대 바로 앞에서 본 분이 알려 주었다.

 

적어도 그 상황에서만은 통일이 온 것이 아닌 가- 이 환상적인 민족의 화합을 나만 느껴본다고 생각하니

집에 계시는 엄마와 집사람 애들이 떠올라서 나는 그 상황에서 눈물이 나서 밥을 먹지 못할

지경이 되어 잠시 땅만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육이오사변 최근의 천안함 사건 기타 등등 북한의 우리 남한에 대한 공격과 피해 입힘 등등을 다 알고

기에 그 복잡한 심정이 매우 착찹 했다.

나중에 들은 예기로는 그 들쭉술의 가격이 중국의 여타 술 가격보다도 5배 이상이 비싸다 하였다.

음식 값도 여타 식당 보다가 무척 고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오래 있을 것 같더니 의외로 다들 빨리 나와서 우린 진달래 공원으로 이동을 했다.

 

가이드 말로 연길시 인구 세명 중 한명이 나와 있다고 하며 특히 신변의 안전과 소지품 관리에

만전을 기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여서 약간의 겁도 났다.

 

진달래 공원에서 내려 잠시 둘러 보는데 아주 다양한 놀이와 안마 먹거리 등이 반겼다.

잠시 후에 이상하게 뱃속이 살살 -- 일행과 화장실로 갔다.

큰 것의 느낌이라서 화장실로 들어 갔는데 나는 거의 아침에 보는데 저녁에 나오니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좀 전에 먹은 보이차의 영향이 아닐까- 효과는 봤다고 생각이 든다.

 

잠시 다니다가 노래방 기기가 있는 곳으로 가니 우리 일행 몇 분이 노래를 부른다.

우리를 보더니 반기며 오라며 여분의 마이크를 안겨 준다.

아 이게 웬 떡이냐 잠시 같이 따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참고로 그 노래방에서 좀 전에 우리 다른 직원이 노래를 부를 려고 하다가 차례가 밀려서 그만 둔

그런 곳이기에 노래한곡이 끝나고 오면서 어찌하여 차례가 왔냐고 하니 한국 돈 2,000원 주고

순번 먼저 타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재치에 박수를 보냈다.

 

현지인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노래방 기기가 두 곳에서 두 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한곳에

약 30-40명의 관객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노래는 한국곡이며 북한곡이나 연길 현지 한글 노래도

가끔 흘러 나와서 이국적이 기분을 더하여 주었다.

어떤 조선족 20대는 우리노래 모나리자를 아주 잘 불러서 감명 깊게 감상을 했었다.

 

진달래 광장을 나와 호텔로 와서 각자 자유시간 후에 취침을 했는데 여독이 귀국후 22일 까지

다리에 알이 덜 풀려서 백두산 관광의 추억을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게 할 것이다.

귀국시 청주 공항으로 약 두시간 이십여분에 걸처서 비행 후에 입국 수속 후에 한참을 기다리니

짐이 나와서 각자 찾아서 나오는데 대전대 총장님께서 입국 하는 일행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며

격려를 해주셔서 몸 둘 바 모르게 감사를 했다.

 

원래 같이 가실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감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부득이 10여명은 여행에 동참을 못해서

안타까웠는데 마지막 날에 뵙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지만 아주 보람 있는 이번 대전대 개교 30주년 기념 중국여행을 기획 추진 해주신 총장님과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 다시 언제 기회가 되면 -물론 개인적이 되겠지만 -북파가 아닌 서파로 등산을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비록 서파 코스가 전문 산악인용 코스라지만 - 집사람과 같이 도전을 해보고 싶은 심적 다짐을 한다.

 

2010-7월 23일 보잘 것 없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감사히 느끼는 유병두 -